구경꾼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
연재 「발주자」 — 코딩 못 하는 교사가 교실 도구를 만들며 배운, 시키는 사람의 조건. 24편 중 3편.

먼저 이 말부터 하고 시작하겠다.
당신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만든 건 게을러서가 아니다.
이 말을 앞에 두는 이유가 있다. 이 편에서 나는 「구경꾼」이라는 말을 쓰게 될 텐데, 그 말이 비난처럼 읽히면 이 시리즈는 여기서 끝나기 때문이다. 나는 그 자리에 아주 오래 서 있었다. 지금 나가는 비난이 있다면 전부 나한테 나가는 것이다.
나는 평생 구경꾼이었다
3년이라거나 5년이라고 쓰고 싶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.
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를 나는 평생 들으며 살았다.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, 그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도, 요즘은 예전보다 쉬워졌다는 것도 다 들었다. 유튜브에서 봤고 뉴스에서 봤다. 성실하게 봤다.
그리고 아무것도 안 만들었다. 한 개도.
이걸 처음 문장으로 적었을 때 좀 이상했다. 평생 그 얘기를 들으면서 평생 한 번도 안 눌러 봤다는 뜻이니까.
게으른 사람의 저녁
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게 하나 있다.
같은 기간에 나는 밤마다 종이돈을 만들고 있었다. 컬러로 인쇄해서, 코팅하고, 한 장씩 잘랐다. 십 년 넘게 그랬다. 아이들 통장에 입출금을 손으로 적었고, 세금을 매주 계산했고, 주가를 정하려고 매일 반 전체와 가위바위보를 했다.
게으른 사람은 그렇게 안 산다.
내 저녁은 비어 있지 않았다. 오히려 꽉 차 있었다. 그런데 그 꽉 찬 저녁 안에서, 나는 그 일을 편하게 만들 방법을 단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. 십 년 넘게 가위질을 하면서 「이걸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」라는 생각을 안 했다는 게 아니다. 생각은 했다. 그다음이 없었을 뿐이다.
그러니까 이건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었다. 부지런함은 충분했다. 부지런함이 향한 방향이 늘 「내 손으로 더 하기」였을 뿐이다.
왜 안 했는가
돌아보면 이유가 있었다. 나쁜 이유도 아니었다.
첫째로, 나는 그게 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. 그런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개발자이거나 회사를 차린 사람이었다. 나는 초등학교 교사다. 화면에 뜨는 제목을 볼 때마다 내 쪽 문이 아니라고 느꼈다. 그 느낌은 틀린 것이었지만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. 그런 이야기에 교사는 안 나온다.
둘째로, 뭘 먼저 해야 하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. 그런 이야기는 결과를 보여 준다. 누가 무엇을 만들어서 어떻게 됐다. 그 사람이 첫날 밤에 뭘 눌렀는지는 안 나온다. 나는 첫날 밤이 궁금했는데 거기에는 그게 없었다.
셋째로, 실패가 무서웠다. 이건 좀 창피한 이유인데 정직하게 쓴다. 나는 십몇 해 동안 아이들 앞에서 설명하는 걸 직업으로 해 온 사람이다. 못하는 걸 못한다고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. 해 보면 안 되는 걸 확인하게 되니까, 확인을 미뤘다.
넷째 이유는 좀 늦게 알았다. 나는 이미 바빴다.
교사의 하루에는 빈 곳이 없다. 수업이 있고, 상담이 있고, 공문이 있고, 다치는 아이가 있다. 퇴근하면 아들 둘이 있다. 그 사이에 새로운 걸 배우려면 뭔가를 빼야 하는데 뺄 게 없었다. 그래서 나는 「시간이 나면」이라고 말했다. 그 시간은 오지 않았다.
이 넷 중에 게으름은 없다.
그래도 결과는 안 달라진다
여기서 나는 나를 봐 주는 걸 멈춰야 했다.
이유가 정당했다는 사실이 결과를 바꾸지는 않는다. 「그때 시간이 없었다」고 말한다고 해서 해마다 3월에 잘린 종이돈이 안 잘린 것이 되지는 않는다. 십 년이 지났고, 종이돈은 여전히 가위로 잘렸고, 아이는 여전히 자기 기록을 직접 못 봤다. 사정이 있었다는 말은 아이의 통장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.
여기에 하나를 더 얹어야 한다. 그 세월 동안 내가 남의 얘기를 보는 데 쓴 시간은, 내 첫 페이지를 띄우는 데 걸린 시간과는 비교가 안 됐다.
그러니 나한테 시간이 없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. 나는 그 시간을 정확히 구경에 썼다.
구경꾼

이 시리즈에서 내가 「구경꾼」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.
시켜 본 적이 없는 사람.
한 번도 무언가에게 「이걸 이렇게 해 줘」라고 말해 보지 않은 사람. 그 결과를 받아 보고 「여기가 틀렸다」고 되돌려 보지 않은 사람.
이게 전부다. 아는 게 적어서도, 관심이 없어서도, 능력이 모자라서도 아니다. 오히려 구경꾼은 대개 아는 게 많다. 나도 도구 이름은 여럿 알았다.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낫다는 얘기도 할 수 있었다. 한 번도 안 열어 봤으면서.
그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나는 오래 몰랐다. 「관심 있는 사람」이라고 부르면 기분은 좋은데 정확하지 않다. 관심은 내내 있었고, 바뀐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.
그러면 구경꾼의 반대말은 무엇인가. 전문가가 아니다. 만드는 사람도 아니다.
시킨 사람이다.
이 시리즈에서 나는 그 사람을 발주자라고 부른다.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원래 있는 말이다. 건물을 짓고 싶은 사람이 직접 벽돌을 쌓지는 않는다. 무엇이 필요한지 설명하고, 지어진 것을 보고, 여기가 틀렸다고 말한다. 그 사람을 발주자라고 부른다.
그러니 발주자는 이런 사람이다.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사람.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. 받은 결과를 보고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.
이 셋 중에 코딩이 필요한 항목은 하나도 없다.
그리고 셋 다 나는 이미 하고 있었다. 십 년 넘게 학급경제를 손으로 굴리면서,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았고 그걸 설명할 수도 있었고 뭐가 잘못됐는지도 알아봤다. 없었던 건 시킬 상대뿐이었다.
이 구분이 좋은 이유는 하나 더 있다. 건너가는 데 필요한 게 한 번뿐이라는 것. 한 번이라도 시켜 보면 그날부로 구경꾼 자리에서 내려온다. 잘 시켰는지 못 시켰는지는 그다음 문제다.
아는 게 늘수록 미루게 된다
이건 좀 이상한 얘기인데, 겪어 보니 사실이었다.
새로운 소식을 볼수록 나는 시작을 미뤘다. 더 좋은 게 나왔다는 얘기를 보면 「그럼 지금 시작하는 건 손해네, 다음 게 더 쉬울 텐데」라고 생각했다. 그 생각을 오래 했다. 그동안 도구는 계속 좋아졌고, 나는 계속 기다렸다.
기다리는 쪽이 늘 합리적으로 느껴졌다. 그리고 실제로 다음 것은 대체로 더 좋았다. 계산이 틀린 적이 없다고 느꼈다는 뜻이다.
계산이 맞는데 결과가 0인 상태를 나는 여러 해 유지했다.
이걸 깨고 나온 계기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. 폰을 바꾸면서 딸려 온 이용권 한 장, 그리고 그날 밤 인쇄하기 싫었던 학습지 한 장. 결심 같은 건 없었다. 나를 움직인 건 귀찮음이었다.
그래서 이 시리즈에서 나는 결심을 요구하지 않으려고 한다. 결심은 잘 안 온다. 대신 이미 당신 손이 하고 있는 반복을 쓰겠다. 그건 이미 와 있으니까.
구경이 길어지면 남는 것
오래 구경하면 지식이 남을 것 같지만, 실제로 남는 건 다른 쪽이었다.
판단력이 남는다. 나는 어떤 얘기가 부풀려졌는지, 어떤 주장이 허풍인지 꽤 잘 골라냈다. 그 감각 자체는 지금도 쓸모가 있다.
문제는 그게 아무것도 겪지 않은 판단력이었다는 데 있다. 나는 실패한 적이 없으므로 실패를 몰랐고, 성공한 적이 없으므로 성공도 몰랐다. 내가 가진 건 남의 결과에 대한 감상이었다.
그리고 감상은 시작을 더 어렵게 만든다. 기준이 이미 높아져 있으니까. 내 첫 페이지가 형편없이 나왔을 때 그걸 견딜 수 있었던 건, 솔직히 그날 밤 아무 기대도 안 했기 때문이다. 기대를 안 한 게 그날의 유일한 준비물이었다.
면죄는 여기까지다
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겠다.
「나는 게으르지 않았다」는 지난 세월에 대한 설명이지, 앞으로에 대한 면제가 아니다. 어제까지는 시작하는 법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. 이 시리즈를 읽고 나면 그 말은 못 쓴다.
나는 그 경계를 정확히 기억한다. 구구단 페이지가 화면에 뜬 그날 밤 이후로, 나한테서 「몰라서 못 했다」는 말이 사라졌다. 편해진 게 아니다. 오히려 그 뒤로 안 되는 게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, 밟히면 고쳐야 하니까 저녁이 없어졌다.
구경꾼이었을 때가 더 편했다. 그건 인정한다. 저녁에 남의 얘기를 보는 쪽과 안 되는 걸 붙들고 앉아 있는 쪽 중에 어느 쪽이 편하냐고 물으면, 답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.
그러니 이 시리즈를 읽는 것도 결국 구경이라면, 읽지 않는 편이 낫다. 나는 읽어서 아는 게 늘어나는 걸 이 글의 목적으로 두고 싶지 않다. 각 편 끝에 「오늘 할 일」을 붙이는 이유가 그것이다. 대개 십 분이면 되고, 대부분 도구가 필요 없다. 오늘 할 일을 건너뛰고 끝까지 읽으면, 당신에게 남는 건 이 시리즈에 대한 감상 하나다.
오늘 할 일
지난 일주일을 떠올려 보자.
AI가 무언가를 만들어 준다는 얘기를 몇 번쯤 봤는가. 유튜브에서든, 뉴스에서든, 옆자리 대화에서든. 정확히 셀 필요는 없다. 서너 번인지 스무 번인지만 알면 된다.
그리고 그중에 당신이 직접 따라 해 본 게 몇 개인지 세어 보라. 읽은 것 말고, 본 것 말고, 창을 열어서 무언가를 시켜 본 것.
내 경우엔 본 것은 셀 수도 없었고, 직접 따라 해 본 것은 오랫동안 0이었다.
그 둘의 차이가 구경의 크기다.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. 나도 그 상태로 평생을 있었고, 그 세월이 없었다면 지금 이 글도 없다. 다만 그 차이를 한번 눈으로 보는 게 좋다. 눈으로 보고 나면 「시간이 없어서」라는 말이 예전만큼 편하게 나오지 않는다.
숫자를 봤으면 다음 편으로 가자. 발주자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5편에서 제대로 짚겠다. 그 전에 못박아 둘 약속이 하나 있다. 이런 글에서 대개 제일 먼저 나오는 약속인데, 나는 그걸 할 자격이 없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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